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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남동쪽에 엘베강을 끼고 형성된 작센주(州)의 주도(州都) 드레스덴(Dresden). 대부분 ‘언덕 위’를 뜻하는 ‘부르크’(brug)와 ‘언덕 아래’를 뜻하는 ‘베르크’(berg)로 끝나는 독일 도시들 가운데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정운찬 총리가 세종시 해법으로 얘기하면서 미국 롤리 트라이앵글과 함께 드레스덴이 거론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이름을 알린 도시다. 옛 동독에 속한 드레스덴은 츠빙거궁전 등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널려 있어 '독일의 피렌체'로 불릴만큼 아름답다. 한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으나 2009년 6월 엘베계곡에 다리를 새로 만들었다가 ‘문화유산’으로서는 처음으로 등재가 취소됐다. 드레스덴은 엘베강에 의해서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뉜다. 엘베강은 체코와 독일 접경지역의 보헤미아 산악지방에서 발원한 블타바강(독일어 몰다우강)과 체코 프라하 북쪽 30㎞ 지점에서 만난다. 드레스덴 구시가에는 1711∼22년 세워져 독일 바로크 양식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츠빙거궁전과 드레스덴성, 대성당 등이 있다. 드레스덴 구시가지 건물 외벽은 모두 불에 그을린듯 거무스름한데, 건축에 쓰인 사암에 아연과 망간 성분이 있어서다. 드레스덴은 세계 2차대전 와중이던 1945년 2월13일부터 사흘간 이어진 연합군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206년 도시로서 인정을 받은 드레스덴 만큼은 공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피난민이 몰려들었는데, 당시 공습으로 2만5000여명이 희생됐다. 지금은 독일 정부의 재건 노력으로 구시가지가 거의 옛 모습을 찾았다. 구시가지 관광은 엘베강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너 드레스덴 드레스덴 성(일명 레지던츠 궁전) 앞 광장에서 시작한다. 오른쪽으로는 궁정교회(Hofkirche)가, 왼쪽 엘베강변에는 괴테가 ‘유럽의 발코니’로 칭찬했다는 브륄의 테라스가 있다. 호프키르체, 영어로 Imperial이라는 뜻이다. 븨륄의 테라스는 1740년 아우구스투스 3세의 친구인 브륄 백작이 만든 정원이라고 한다. 브륄의 테라스에서 드레스덴 예술대학 주변 시장골목을 거쳐 광장으로 나가면 성모교회(프라우엔교회)가 나타난다. 예술대학 건물에서 괴테의 얼굴상이 새긴 부조물을 볼 수 있다. 2차세계대전 때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파괴된 성모교회는 1990년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가 통일 이후 1992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돼 2006년 끝났다. 영국은 전후 폭탄 투하를 사죄하고 성모교회 재건을 위해 교회 꼭대기에 올리는 황금빛 십자가를 기증했다고 한다. 40%만 남은 원형에 7000여개의 돌덩어리를 들여 복원했다. 교회 앞에는 2차 대전때 교회 돔에서 떨어진 잔해가 그대로 보존돼 당시의 아픔을 상기시켜 준다. 2차세계대전 때 파괴됐다가 복원된 성모교회 외벽은 검은색 원형과 복원 부분 색깔이 다르다. 아래에는 건물에서 떨어져 나온 원형 일부분이 보존돼 있다. 떨어진 부분에 붙여놓은 돔모양에서 조그맣게 뚫린 곳은 교회 건물의 돔 해당부위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뜻이다. 드레스덴성 벽의 벽화 '군주들의 행렬' 드레스덴 성과 궁정교회 사이로 지나가면 그 유명한 츠빙거 궁전과 맥주 광고에 나와 더욱 유명해진 잼퍼 오페라를 만날 수 있다. sksksksksksk아우구스투스 1세의 여름 별장용으로 지어진 츠빙거 궁전. 좌우대칭을 강조하는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꼽힌다. 안에는 미술관, 도자기 박물관, 동물학 박물관 등이 있다. 츠빙거 궁전은 좌우대칭을 강조하는 바로크 양식을 잘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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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10분. 일요일의 달콤함을 산산조각낸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그 끔찍한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다.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정원(207명)을 훨씬 초과해 362명을 태우고 가던 110t급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강풍과 파도에 좌초했다. 위도 주민 63명을 비롯해 승객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상 최대 해난사고였다. 사고 이틀째인 10월12일 한 종합일간지에 ‘선장 백운두씨가 살아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소맷자락 하나 젖지 않은 채 구조 어선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얼굴은 수심이 가득했으며 말없이 마을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 신문이 전한 주민들의 목격담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타사 기자들은 경악했다. 낙종(落種)도 이만저만한 낙종이 아니었다. 가판이 있던 시절이라, 초판 신문을 본 상당수 언론사가 이 기사를 받아썼다.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수사당국이 수사관을 급파하고 백씨 집을 압수수색하는 등 소동이 일었다. 급기야 숨진 백 선장이 지명수배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백씨가 중국으로 도주했을 것이라는 속보도 나왔다. 그러나 사흘 뒤 백 선장은 싸늘한 시신으로 인양됐다. 당시 백 선장 생존설을 회의적으로 본 기자와 기사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분노로 들끓은 여론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나친 속보경쟁의 폐해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였다. 특히 재난보도에서 기자들의 보도 태도를 되새기게 하는 사례로 꼽힌다. 17년이란 세월이 흘러서인지 백 선장 오보의 교훈이 너무 쉽게 잊힌 듯하다. 천안함 침몰사고 3일째인 지난달 28일 ‘실종자 휴대전화에서 발신이 있었다’는 인터넷 기사가 잇따랐다. 그날 오후 3시3분 한 경제지는 ‘천안함 실종자 1명, 가족에게 전화 주장’이라는 급보를 띄웠다. 4분 뒤에는 다른 경제지가 ‘실종자 여러 명 배 안에 생존’이라는 기사를 급히 인터넷에 올렸다. 군당국과 각 언론사는 이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젯밤에는 실종자 시신 4구가 발견됐다는 한 지역방송사의 ‘단독보도’가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이 크게 충격을 받아 몇몇은 끝내 실신했다. 군이 “명백한 오보”라고 밝혔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것 말고도 한 방송사는 군 발표와 달리 천안함이 물이 새는 사고를 겪은 뒤 5㎞를 떠내려 가다 반파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아직껏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정황이 드러난 건 없다. 사고 당일 밤 방송사들이 뉴스특보를 내보내면서 북한 연루 가능성을 언급할 때에도 표현에 더욱 신중했어야 한다. 잘못된 보도 실종자 가족 울린다 17년 전에 비해 지금의 오보 확대·재생산 과정은 훨씬 빠르고 파괴력은 더욱 크다. 훈련받지 않은 기자들이 속보경쟁, 클릭경쟁에 기사를 마구 쏟아내는 현실이다. 그러나 오보나 성급한 보도는 실종자 가족의 가슴을 후벼파고 당국의 구조작업을 방해할 수 있다. 실종자 가족까지 나서 “추측 보도와 확인되지 않은 사항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나선 마당이다. 언론계는 백 선장 생존설 오보의 불명예를 잊지 말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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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전 총장은 18일 서울 관훈동 신영기금회관에서 법조언론인클럽 초청으로 열린 ‘검찰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주제의 간담회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정 전 총장은 “지난해 3월 사법연수원 강연에 앞서 연수원생들에게 법조 불신 이유를 적어 내도록 했더니 법원에 대해서는 ‘엘리트 의식’, ‘온정주의’를, 변호사에 대해서는 ‘돈벌이’이가 가장 많았고 검찰에 대해서는 700여중 410여명이 ‘정치검찰’을 들더라”고 소개했다. 그는 “대륙법 체계인 우리 형사사법체계에서 검찰은 태생적으로 법원과 마찬가지로 권력기관으로서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서 “검찰이 국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99%인 일반 사건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일을 잘해야 하고 이를 위해 검찰 인사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총장은 “검사 정년 63세에 정년이 65세인 검사총장(우리의 검찰총장)에 오르는 일본처럼 검찰총장 임기를 2년으로 한 것 같은데 총장이 제대로 일하기에 너무 짧으며, 이 마저도 임기제 총장이 도입된 이후 15명 중 7명 뿐이었다”며 “3년 정도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검사와 부장검사는 1년, 지도부는 6개월 단위로 옮겨다니다 보니 지방 발령난 검사는 서울로 갈 날만 기다리게 된다”며 “승진을 위한 인사인지, 국민을 위한 인사인지 모를 정도”라고 덧붙였다. 정 전 총장은 “법무부장관이 대통령에게 검사 인사를 제청하도록 규정한 검찰청법 34조 조항에 ‘검찰총장 의견을 들어’라는 조항이 들어간 게 2004년 1월”이라면서 “이 부분도 임의조항이냐 강제조항이냐, 서명에 의해서냐 구두로냐 등을 놓고 이견이 있고 장관과 총장 의견이 엇갈릴 때 장관이 법대로 하자고 하면 총장으로선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검찰이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검사 숫자를 늘리기 보다 수사권 조정을 통해 형사사건의 96%를 맡아 종결짓는 경찰에 수사권을 줘야 한다”면서 “재임 시절 이런 소신으로 경찰과 협의했으나 경찰이 검찰의 지휘감독마저 못받겠다고 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검찰 수사의 공정성과 관련, “검찰에 대해 표적수사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전체 비리를 다 수사할 수는 없다. 특수수사는 표적수사라고 봐야 한다”며 “다만 그 수사가 불편부당한지, 공정한지 하느냐를 놓고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총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시절 검찰의 정치적 독립과 관련, “감히 말할 수 있는데, 정치권에서 구체적 사건에 대해 말한 적 없다. 법무부장관도 못했다”면서 “오히려 검찰총장으로서 누구와도 상의하지 못하고 혼자 결정해야 할 때가 가장 외롭고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부른 ‘박연차 게이트’ 수사 당시 심경을 묻는 질문에 “어느 일간지에 소회 일단을 소개한 적 있다”고만 언급했다. 중앙선데이는 지난해 6월 정 전 총장이 “나는 노 전 대통령이 거짓말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몰랐다’고 주장해도 아무도 안 믿어 준다. 그럼 바보가 되는 것이다. 바보니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사업가는 돈을 줬다고 하고 최고위 공직자는 모른다고 한다. 이때 누구 말을 믿을 건가. 대통령이 일개 사업가에게 돈을 달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사법고시 17회 동기인 정 전 총장은 2007년 11월 임기 2년을 마치고 검찰을 떠났다. 박희준 기자 http://twitter.com/seoulblogger *다음은 정상명 검찰총장의 강연 전문이다. 가급적 발언 그대로를 살리려고 했다. 2010년3월18일 법조언론인클럽 초청 간담회 형사사법체계의 의미가 무얼까? "우리 형사사법은 영미법 보다 대륙법 체계" 우선 권력구조를 보면 대륙법은 중앙집권이다. 영미법은 지방분권이다. "검찰과 법원은 태생적으로 권력기관" 신뢰회복 방안은 뭘까. 법조가 일 잘하는 법조가 돼야 한다. 정치적 사건 1%도 안되는 것으로 불신받고 그 피해는 전부 국민에게 간다. -어느 장관이 한 검사 놓고 몇군데에서 전화 받았다고 소개한 적 있는데, 총장재직 시절 인사 부탁은 어땠는지 소개해 달라. 그리고 중요한 정치적 사건 때 청와대나 법무부장관 지시나 지침 받은 적은 없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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