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글은 http://himyblog.tistory.com/488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독일 남동쪽에 엘베강을 끼고 형성된 작센주(州)의 주도(州都) 드레스덴(Dresden). 대부분 ‘언덕 위’를 뜻하는 ‘부르크’(brug)와 ‘언덕 아래’를 뜻하는 ‘베르크’(berg)로 끝나는 독일 도시들 가운데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정운찬 총리가 세종시 해법으로 얘기하면서 미국 롤리 트라이앵글과 함께 드레스덴이 거론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이름을 알린 도시다.
옛 동독에 속한 드레스덴은 츠빙거궁전 등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널려 있어 '독일의 피렌체'로 불릴만큼 아름답다. 한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으나 2009년 6월 엘베계곡에 다리를 새로 만들었다가 ‘문화유산’으로서는 처음으로 등재가 취소됐다.
 드레스덴은 엘베강에 의해서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뉜다. 엘베강은 체코와 독일 접경지역의 보헤미아 산악지방에서 발원한 블타바강(독일어 몰다우강)과 체코 프라하 북쪽 30㎞ 지점에서 만난다.
 드레스덴 구시가에는 1711∼22년 세워져 독일 바로크 양식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츠빙거궁전과 드레스덴성, 대성당 등이 있다. 드레스덴 구시가지 건물 외벽은 모두 불에 그을린듯 거무스름한데, 건축에 쓰인 사암에 아연과 망간 성분이 있어서다.
 드레스덴은 세계 2차대전 와중이던 1945년 2월13일부터 사흘간 이어진 연합군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206년 도시로서 인정을 받은 드레스덴 만큼은 공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피난민이 몰려들었는데, 당시 공습으로 2만5000여명이 희생됐다. 지금은 독일 정부의 재건 노력으로 구시가지가 거의 옛 모습을 찾았다.
 

  구시가지 관광은 엘베강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너 드레스덴 드레스덴 성(일명 레지던츠 궁전) 앞 광장에서 시작한다. 오른쪽으로는 궁정교회(Hofkirche)가, 왼쪽 엘베강변에는 괴테가 ‘유럽의 발코니’로 칭찬했다는 브륄의 테라스가 있다. 호프키르체, 영어로 Imperial이라는 뜻이다. 븨륄의 테라스는 1740년 아우구스투스 3세의 친구인 브륄 백작이 만든 정원이라고 한다.
 브륄의 테라스에서 드레스덴 예술대학 주변 시장골목을 거쳐 광장으로 나가면 성모교회(프라우엔교회)가 나타난다. 예술대학 건물에서 괴테의 얼굴상이 새긴 부조물을 볼 수 있다.
 2차세계대전 때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파괴된 성모교회는 1990년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가 통일 이후 1992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돼 2006년 끝났다. 영국은 전후 폭탄 투하를 사죄하고 성모교회 재건을 위해 교회 꼭대기에 올리는 황금빛 십자가를 기증했다고 한다. 40%만 남은 원형에 7000여개의 돌덩어리를 들여 복원했다. 교회 앞에는 2차 대전때 교회 돔에서 떨어진 잔해가 그대로 보존돼 당시의 아픔을 상기시켜 준다.
 

2차세계대전 때 파괴됐다가 복원된 성모교회 외벽은 검은색 원형과 복원 부분 색깔이 다르다. 아래에는 건물에서 떨어져 나온 원형 일부분이 보존돼 있다. 떨어진 부분에 붙여놓은 돔모양에서 조그맣게 뚫린 곳은 교회 건물의 돔 해당부위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뜻이다.

 성모교회에서 다시 드레스덴 성쪽으로 걷다 보면 거대한 벽화를 만나게 된다. ‘군주들의 행렬’이라고 이름붙여진, 8m 높이에 101m 길이의 벽화에는 역대 작센주 군주 30명이 행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애초 벽에 그려진 벽화를 나중에 마이센 도자기 타일 2만7000개로 구워 만들어 붙였다고 한다.
 

드레스덴성 벽의 벽화 '군주들의 행렬'

드레스덴 성은 12세기부터 역대 작센 군주가 살던 성으로 증축과 복원을 거듭해 복합적인 스타일의 건축물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뒤 지금까지 복원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벽화는 공습에도 기적적으로 남았다고 한다.
 드레스덴 성과 궁정교회 사이로 지나가면 그 유명한 츠빙거 궁전과 맥주 광고에 나와 더욱 유명해진 잼퍼 오페라를 만날 수 있다.
 sksksksksksk아우구스투스 1세의 여름 별장용으로 지어진 츠빙거 궁전. 좌우대칭을 강조하는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꼽힌다. 안에는 미술관, 도자기 박물관, 동물학 박물관 등이 있다.
 

츠빙거 궁전은 좌우대칭을 강조하는 바로크 양식을 잘 보여준다.

 츠빙거궁전 북쪽 회랑에 있는 미술관에는 15~18세기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어 루벤스, 렘브란트, 뒤러 등을 만날 수 있다. 도자기 박물관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형형색색의 도자기와 인근의 마이센에서 제작된 도자기 등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작품에 관한 글은 http://himyblog.tistory.com/46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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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10분. 일요일의 달콤함을 산산조각낸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그 끔찍한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다.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정원(207명)을 훨씬 초과해 362명을 태우고 가던 110t급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강풍과 파도에 좌초했다. 위도 주민 63명을 비롯해 승객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상 최대 해난사고였다. 

 변산반도에서 14㎞ 떨어진 14㎢ 면적의 작은 섬에 전국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낚시천국’ 위도는 특종(特種)기사를 ‘낚으려는’ 언론사 간 경쟁의 장이었다. 경쟁적으로 급히 쏘다 보면 오발(誤發)이 있는 법. 언론계에서 두고두고 회자하는 대형 오보(誤報)가 만들어졌다. 사고 당시 숨진 선장 백운두(당시 56세)씨의 생존설이 그것이다.

신문기사로 살아난 '죽은 백 선장'

 사고 이틀째인 10월12일 한 종합일간지에 ‘선장 백운두씨가 살아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소맷자락 하나 젖지 않은 채 구조 어선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얼굴은 수심이 가득했으며 말없이 마을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 신문이 전한 주민들의 목격담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타사 기자들은 경악했다. 낙종(落種)도 이만저만한 낙종이 아니었다.

 가판이 있던 시절이라, 초판 신문을 본 상당수 언론사가 이 기사를 받아썼다.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수사당국이 수사관을 급파하고 백씨 집을 압수수색하는 등 소동이 일었다. 급기야 숨진 백 선장이 지명수배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백씨가 중국으로 도주했을 것이라는 속보도 나왔다. 그러나 사흘 뒤 백 선장은 싸늘한 시신으로 인양됐다.

 당시 백 선장 생존설을 회의적으로 본 기자와 기사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분노로 들끓은 여론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나친 속보경쟁의 폐해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였다. 특히 재난보도에서 기자들의 보도 태도를 되새기게 하는 사례로 꼽힌다. 17년이란 세월이 흘러서인지 백 선장 오보의 교훈이 너무 쉽게 잊힌 듯하다.

 천안함 침몰사고 3일째인 지난달 28일 ‘실종자 휴대전화에서 발신이 있었다’는 인터넷 기사가 잇따랐다. 그날 오후 3시3분 한 경제지는 ‘천안함 실종자 1명, 가족에게 전화 주장’이라는 급보를 띄웠다. 4분 뒤에는 다른 경제지가 ‘실종자 여러 명 배 안에 생존’이라는 기사를 급히 인터넷에 올렸다. 군당국과 각 언론사는 이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경제지는 경쟁하듯 ‘2번째 실종자 전화, 가족에게 전달’, ‘여러 명 배 안에 생존’ 등의 기사를 내보냈다. 나중에 수정되긴 했으나 실종자와 가족이 통화했다는 속보까지 있었다. 몇몇 인터넷신문과 통신사가 이를 인용해 보도했다.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시한(69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에서 군의 구조·수색작업에 차질을 줄 만한 오보 소동이었다.

 그젯밤에는 실종자 시신 4구가 발견됐다는 한 지역방송사의 ‘단독보도’가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이 크게 충격을 받아 몇몇은 끝내 실신했다. 군이 “명백한 오보”라고 밝혔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것 말고도 한 방송사는 군 발표와 달리 천안함이 물이 새는 사고를 겪은 뒤 5㎞를 떠내려 가다 반파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아직껏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정황이 드러난 건 없다. 사고 당일 밤 방송사들이 뉴스특보를 내보내면서 북한 연루 가능성을 언급할 때에도 표현에 더욱 신중했어야 한다.

잘못된 보도 실종자 가족 울린다 

꽃다운 젊은이 46명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 속이 타들어가는 마음이 누군들 다를까. 차디찬 수십 미터 바닷속에 갇힌 실종자를 생각하면 구조작업은 더욱 더디게만 느껴진다. 최악의 조건에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순직한 한주호 준위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구해내야 한다는 일념이 그를 물속으로 뛰어들도록 한 것이다.

 17년 전에 비해 지금의 오보 확대·재생산 과정은 훨씬 빠르고 파괴력은 더욱 크다. 훈련받지 않은 기자들이 속보경쟁, 클릭경쟁에 기사를 마구 쏟아내는 현실이다. 그러나 오보나 성급한 보도는 실종자 가족의 가슴을 후벼파고 당국의 구조작업을 방해할 수 있다. 실종자 가족까지 나서 “추측 보도와 확인되지 않은 사항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나선 마당이다. 언론계는 백 선장 생존설 오보의 불명예를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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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명 전 검찰총장은 “국민의 검찰 불신은 전체 1%도 안 되는 정치적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검찰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에서 자유롭고, 인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총장은 18일 서울 관훈동 신영기금회관에서 법조언론인클럽 초청으로 열린 ‘검찰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주제의 간담회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정 전 총장은 “지난해 3월 사법연수원 강연에 앞서 연수원생들에게 법조 불신 이유를 적어 내도록 했더니 법원에 대해서는 ‘엘리트 의식’, ‘온정주의’를, 변호사에 대해서는 ‘돈벌이’이가 가장 많았고 검찰에 대해서는 700여중 410여명이 ‘정치검찰’을 들더라”고 소개했다.
 그는 “대륙법 체계인 우리 형사사법체계에서 검찰은 태생적으로 법원과 마찬가지로 권력기관으로서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서 “검찰이 국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99%인 일반 사건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일을 잘해야 하고 이를 위해 검찰 인사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총장은 “검사 정년 63세에 정년이 65세인 검사총장(우리의 검찰총장)에 오르는 일본처럼 검찰총장 임기를 2년으로 한 것 같은데 총장이 제대로 일하기에 너무 짧으며, 이 마저도 임기제 총장이 도입된 이후 15명 중 7명 뿐이었다”며 “3년 정도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검사와 부장검사는 1년, 지도부는 6개월 단위로 옮겨다니다 보니 지방 발령난 검사는 서울로 갈 날만 기다리게 된다”며 “승진을 위한 인사인지, 국민을 위한 인사인지 모를 정도”라고 덧붙였다.
 정 전 총장은 “법무부장관이 대통령에게 검사 인사를 제청하도록 규정한 검찰청법 34조 조항에 ‘검찰총장 의견을 들어’라는 조항이 들어간 게 2004년 1월”이라면서 “이 부분도 임의조항이냐 강제조항이냐, 서명에 의해서냐 구두로냐 등을 놓고 이견이 있고 장관과 총장 의견이 엇갈릴 때 장관이 법대로 하자고 하면 총장으로선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검찰이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검사 숫자를 늘리기 보다 수사권 조정을 통해 형사사건의 96%를 맡아 종결짓는 경찰에 수사권을 줘야 한다”면서 “재임 시절 이런 소신으로 경찰과 협의했으나 경찰이 검찰의 지휘감독마저 못받겠다고 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검찰 수사의 공정성과 관련, “검찰에 대해 표적수사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전체 비리를 다 수사할 수는 없다. 특수수사는 표적수사라고 봐야 한다”며 “다만 그 수사가 불편부당한지, 공정한지 하느냐를 놓고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총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시절 검찰의 정치적 독립과 관련, “감히 말할 수 있는데, 정치권에서 구체적 사건에 대해 말한 적 없다. 법무부장관도 못했다”면서 “오히려 검찰총장으로서 누구와도 상의하지 못하고 혼자 결정해야 할 때가 가장 외롭고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부른 ‘박연차 게이트’ 수사 당시 심경을 묻는 질문에 “어느 일간지에 소회 일단을 소개한 적 있다”고만 언급했다. 중앙선데이는 지난해 6월 정 전 총장이 “나는 노 전 대통령이 거짓말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몰랐다’고 주장해도 아무도 안 믿어 준다. 그럼 바보가 되는 것이다. 바보니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사업가는 돈을 줬다고 하고 최고위 공직자는 모른다고 한다. 이때 누구 말을 믿을 건가. 대통령이 일개 사업가에게 돈을 달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사법고시 17회 동기인 정 전 총장은 2007년 11월 임기 2년을 마치고 검찰을 떠났다.
 박희준 기자
http://twitter.com/seoulblogger

*다음은 정상명 검찰총장의 강연 전문이다. 가급적 발언 그대로를 살리려고 했다.

 2010년3월18일 법조언론인클럽 초청 간담회
 '검찰에 대한 오해와 진실’
 재직중 간담회를 안했다. 퇴직후에도 일간지 방송사 인터뷰 요청 일절 응하지 않았다.
 기자는 산 증인이다. 준 법조인이니 본 바를 꼭 검찰에 얘기해 주길 바란다. 법조 경험을 책으로 써야 한다. 현직은 검사로서 공시시효가 있어서 어렵다. 특정사건에 대해 책을 써서 법문화, 법치문화에 도움 되도록 해달라.
 주제가 검찰 오해와 진실인데 형사사법체계 비교법적으로 한국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봐야 연역적으로 설명이 될 것 같다.
 검찰에 대해 권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청와대나 정치권 눈치를 본다고 우려한다. 비난보다 우려라고 본다.
 지난 3월 일산 연수원 강의 때 종이 나눠주고 강의시작전 법조 불신, 3역에 대해 한가지씩 들어보라고 했다. 검찰에 1위가 정치검찰이다. 410명이. 그 때 700명 정도였던 것 같은데 410명이 그걸 답으로 적어냈다. 법원은 엘리트의식과 온정주의가 나오고. 변호사는 돈만 안다는 답이 많았다.
 정치검찰이 역시 문제다. 영남대 로스쿨에서도 똑같은 반응이 나오더라. 후배 법조인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오늘 거기에 포커스를 맞춰 얘기하겠다.

 형사사법체계의 의미가 무얼까?
 사법부라고 할 때 법원이라고 하면 협의다. 광의의 형사사법체계는 내사에서 조사 수사 기소 재판 집행 모두가 포함된다. 대륙법과 영미법 차이를 9가지 정도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우리 형사사법은 영미법 보다 대륙법 체계"

 우선 권력구조를 보면 대륙법은 중앙집권이다. 영미법은 지방분권이다.
 형벌에 대한 시각은  대륙법이 사회에 대한 벌이라고 보나 영미법은 개인간 심판주의다.
사법목적도 대륙법은 실체적 진실발견과 정의구현이나 영미법은 절차를 강조한다.영국에서는 심지어 니들끼리 결투해서 가려라. 나는 심판만 할테니 그런 식이다. 신의 뜻이라고 본다.
 방법 또는 주체를 보면 대륙법은 직권주의다. 법원이 한다. 재판법원과 수사를 하는 예심판사가 있어서. 영미법은 당사자주의니 당사자가 한다.
 임명은 대륙법은 왕이 하고 영미법은 선출한다. 미국에서 UA Attorney는 정부가 임명하기는 하지만 선출하는 District Attorney가 주다.
 통제방식도 다르다. 대륙법에서 법원이나 검찰은 권력기관이다. 법원이 전권을 행사했다. 규문주의다. 예심판사는 밀행주의에 비밀주의고 자백에 의존한다. 자백강요 위해 권한 남용하고 가혹행위를 하는데 이를 막으려고 판사는 재판만 해라. 그래서 프랑스혁명 이후 검찰이 나타난 것이다. 검찰은 200년밖 안됐다. 근대적 의미에서 검사가 나온 것이다. 법원의 규문주의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예심판사가 하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법원과 갈등의 씨앗도 여기에 있다. 법원은 애초부터 자기들 권한이었다고 보고 검찰은 법원에서 떼서 검찰에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미법에서는 시민통제다. 자치주민이 통제한다. 법원치안판사제도를 통제한다. 기소는 대배심제도로 하고 검사도 대배심명령으로 자료도 제출해야 한다. 기소후 재판에서는 유무죄 판단은 배심원이 한다. 법관은 위법증거 나오거나 절차 잘못 나오는지만 본다. 심판자로서 역할만 한다. 양형도 양향기준표로 통제하고 있다. 시민들이 통제하고 무죄가 나면 검사는 항소조차 못한다. 양형기준법가 엄청 자세하게 돼 있다. 통제하다보니 사람들에게는 인권주의적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대륙법에서도 검사는 통제하려고 한다. 반인권 권력주의로 갈까봐. 검찰 파쇼얘기도 나오고. 통제를 어떻게 갈까? 영미법에서 가져온게 바로 수사심의제도니 뭐니 하는 것들이다.
 영미법은 대배심 만들고 그러면서 비용이 너무 들어간다. 그 부분이 고민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대륙법의 검사제도를 가져간 것이다. 광활한 땅에서 범죄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위해서는 검사제도가 효율적이다. 대륙법은 영미법에서, 영미법은 대륙법에 서로 흥미를 가진다.
 대륙법에서는 법원과 검찰 기관싸움이 일고 경찰과 싸우고. 대륙법에서는 예심판사가 경찰을 지휘했으니 검찰이 그것을 가져온만큼 검차이 사법경찰관을 지휘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될 수가 없다.영미법은 고비용이다 보니 비용절감을 위해 플리바겐이 나오고 그랬다.
 피의자가 검찰이나 조사기과네 나가 조사받는게 당연하다고 보는데 그게 아니다. 영미법에서는. 대륙법은 당연하다. 왜? 실체적 진실규명을 해야 하니까 당연히 조사받아야 한다. 그러나 영미법은 아니다. 영미법에는 피의자 신문조사가 없다. 진술서만 있을 뿐이다. 조사하는 사람, 경찰과 검찰 있는데 당사자와 대등하면 조사가 안되니 중요 피의자에게 강제출석의무를 부과하고 허위진술을 처벌한다. 양형기준을 만드는 것. 영미법은 그래서.
 대륙법 속에서 국민 생각이 영미법으로 가려고 하니 검찰이 진술강제권이니 플리바겐 등을 주장하는 것이다.
 로스쿨도 대륙법에서는 없다. 법조 일원화도 직업 관료가 있으면 그런 얘기가 안 나온다. 프랑스에서는 판사와 검사가 서로 왔다갔다 한다. 판사는 법무부 소속이다. 영미법에서는 그런 게 없다.
 전관예우도 영미법에서는 자유경재이다. 고비용이 되지만. 당사자주의다보니 서로 돈 한번 써봐라 한다. 수임료에 제한이 없다. 독일은 수임료를 제한하고 있다 대륙법에서는 전관예우가 없다. 전관이라는게 득을 봐야 그게 있지 득이 없으면/. 전관예우는 왜 문제냐면 수임료가 비싸다는 것인데..공급자 측면에서 개업지 제안하고 하다보니 틈새가 생긴다. 수요자 측면에서 수임료를 제한해야 한다.
 수사권 독립도 대륙법에서는 문제되지 않는다. 영미법은 당사자가 경찰과 개인이니.
 정치색은 영미법이 정치색이 옅고. 대륙법은 정치권 영향을 받는다.

 "검찰과 법원은 태생적으로 권력기관"
 
 우리나라는 어떤가.
 일제강점기 일본은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서 완성된 대륙법을 도입했다. 총독령으로 예심판사 권한을 경찰에 줬다. 그래서 전 세계 유일하게, 경찰이 10일간 구속가능한 지금의 상황이 된 것이다. 일본 본국에서 검사를 통해 통제하기 어려워서 조선에 있는 조선 경찰들에게 권한을 줘서 경찰국가를 만든 것이다.  미군정때 영미법이 들어오면서 혼재되고.
 대륙법적 접근이냐 영미법적 접근이냐. 영미법은 인권보호하고 당사자주의라서 좋다? 그게 아니다. 제도는 그 시대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국민이 선택을 잘 하게 언론이 역할을 해줘야 한다.
 우리는 일본 통해 가져온 대륙법체계이다. 국민 정서도 도둑놈은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과거에 절차 어기고 위법수집증거를 수집해도 진범이니까, 가혹행위 있어도 그런대로 인정했다. 철야수사를 안하면 오히려 봐준다고 한게 엊그제다. 12시 전에 보내주면 문제가 되던 때도 있었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요구였다. 김길태 얼굴 공개한 것도 그렇고 사형제 여론이 들끓는 것도 그렇고 우린 영미법보다 대륙법 체계이다.
 저비용 고효율 노리는게 우리나라 사람인데 대륙법 체계가 아직은 우리에게 맞다.
 여기에 영미법의 인권보호 조항이 들어가면서 검찰의 고민이 시작된다. 로스쿨 경력법관 등등. 우리나라 검찰은 수사해서 공소를 제기하고 사법경찰을 지휘하고 법원에 영장을 청구하고 국가송무를 맡고 있는데 대륙법 체계 그대로다.
 권력기관이다. 정치검찰이다. 권력기관으로서 검찰은 대륙법에서 태생적 한계다. 판사의 예심판사 권한을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내사와 조사 기소를 떼 준 것이다. 권력기관일 수밖에 없다. 법원도 권력기관이다. 공판중심주의 구술주의 등을 하면서 권력을 지니고 있다. 변호사도 권력기관으로 착각하고는 한다. 갑과 을 관계에서 을이면서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만으로 갑인줄 안다. 수요자 입장에서 보자. 그러면 권력기관으로 비쳐진다. 정당도, 청와대, 대통령도, 언론도 권력기관이다. 시민단체도 그렇다.
 권력기관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남용하는게 나쁘다. 대륙법 체계에서 치안을 세우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당연하다.
 정치검찰 부분은 전 사건의 1%도 안되는 정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6년 총장 재직 때 외부 용역을 맡겼다. 일반사건 신뢰되는 55%로 나왔다. 정치사건에 대해 긍정하냐고 물었더나 72.5%가 아니다라고 했다.
 검찰이 정치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하다. 권력기관과 수사가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을 장악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검찰 파쇼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 권력의 속성이다. 인사권자가 통제하느냐 국민이 통제하느냐 그 차이일 뿐이다. 권력자는 광의의 권력자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검사들 수사 잘한다. 사명감이 있다. 형사부 야근이 심해서 통계 내보니 17일간 야근한 검사도 있더라. 야근 많이 하는 부서는 우수부서 선정에서 제외하라고 했더니 컴퓨터를 켜지 않고 일하도록 부장들이 시키더라. 컴퓨터를 켜면 대검에서 전부 통계가 나오니까. 명예심에서다. 실체를 밝히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러나 고소사건이 전형적인데 검사가 고소인 불러 조사할 때에 고소인은 자기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피고소인 불러 조사하고 고소인 다시 불러 이것저것 물어 논리를 따지면 ‘어 갑자기 왜 이래’ 생각해서 변호인 찾아가고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정치사건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수사의 속성이다.
 
 표적수사가 맞다. 표적수사 안 하면 수사 어떻게 하느냐. 우리나라 전체 사건을 어떻게 다 수사하느냐. 특수수사는 표적수사다. 다만 불편부당하게 공정하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1% 정치사건으로 불신, 99% 일반사건으로 승부해야"

 신뢰회복 방안은 뭘까. 법조가 일 잘하는 법조가 돼야 한다. 정치적 사건 1%도 안되는 것으로 불신받고 그 피해는 전부 국민에게 간다.
 이를 위해서는 99% 일반 국민사건을 일 잘해서 일로 승부해야 한다. 100대 과제를 선정해 추진한 것도 이를 위해서다.
 그렇다고 사람을 늘리는 게 아니다. 업무량을 17일 야근해서 정신이 맑겠나? 업무를 검찰이 다 끌어안지 말고 줄여라. 수사권독립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조정이다. 지금도 96%의 사건을 경찰이 한다. 총장 때 그런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왜 수사권조정이 안됐냐면 지휘감독을 아예 안받겠다고 해서다. 대륙법에서 경찰에 대한 지휘권을 검찰이 갖는 건 당연하다. 국민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최근 법관은 경력자 중에서 뽑고 검찰은 누구나 해도 된다고 하던데 정말 화가 났다. 형사사건에서 한번 메스를 잘못 대면 치유가 어렵다.
 제도는 잘 돼 있는데 잘 안되는 게 인사다. 특히 검찰 인사가 중요하다. 재임 때 2년간 논의했다. 검찰 인사는 장관의 권한, 대톨영의 권한이니 총장이 연구한다고 하니 기분 안좋았을 것이다. 검사 인사를 장관이 대통령에게 제청하도록 돼 있는데 검찰청법 34조에 ‘검찰 총장 의견을 들어’라는 부분이 들어간게 2004년 1월이다. 이 부분도 임의냐, 강제냐? 서면이냐 구두냐? 논란거리다. 그 전에도 상의는 했는데 법에 의해 제도적으로 하는게 중요하다. 장관이 법대로 하자고 하면 할 수 있는게 없다.
 법무와 검찰은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자기 사람을 데려다 일하면서 인권과 사회정의보호하려고 한다. 총장은 자기가 원하는 유능한 사람을 데리고 일하려 한다.
 인사청문회가 힘들면서 긍정적인게 국민에 대해 선서했기 때문에 어려울 때 그게 생각난다. 그 선서가 어른거려서 함부로 못한다. ‘속기록에 이렇게 말한게 있는데’라면서 들이밀면 뭐라고 말하겠나. 다만 지나치게 사생활 들추고 흠집내면 권위가 안 서는 문제가 있다.
 총장 임기도 2년이 아니라 3년은 해야 한다. 임기제로 2년 하는 나라는 없다. 3년, 5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일본이 임기가 없고 다만 관행적으로 2년인데 그것도 검사 정년이 63세다. 그 정년을 맞아서 정년이 65세인 검사총장이 되다뵈니 2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법부는 6년, 감사원장도 5년인데 준사법기관에도 대등한 기간을 줘야 한다.
 검사 인사도 1년 단위, 부장검사까지 1년 단위이고 지도부로 가면 6개월마다 옮겨다닌다. 승진을 위한 인사냐, 국민을 위한 인사냐. 검사장 왔다고 하는데 어느날 간다고 한다. 총장도 2년인데 보장도 안된다. 내가 14번째 임기제 총장인데 나 포함해서 7명이 채웠다.
 검사장 승진인사가 어렵다. 누구나 다 온 인생을 건다. 공명심도 있고. 일 잘하는 검찰 하려면 검사장 승진이 한 기수에 5,6명인데 그래서는 안된다.  동기가 30명 정도가 검사장 근처까지 가서 남는데 2,3명 되면 그것도 주력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정치권에서 부탁해서 됐다는 눈총이나 받아서 검사장 승진하고서도 고개 숙이고 다닌다. 반은 아니어도 40%는 승진시켜줘야 한다. 직급이란 게 있다. 특수 공안별로 인원이 있다. 다행히 검사장 자리를 8자리를 그 때 늘려 지금은 한 기수에 12명을 승진시킨다.
 
 "검찰 개혁은 인사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되려면 인사운동 말아야 한다. 밖으로 뛰지 않아야 한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운동하면 총장보고 시켜주실 거냐고 물었을 때 총장이 일 잘하면 시켜준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특수 공안 기획 형사 몇명씩 승진해야 적정한지 분석한 적 있는데 11명에서 12,3명이어야 하더라. 군 인사는 보직별로 참 체계적이더라. 미국식이라서 그런듯하다.
 검사 인사를 1년 단위로 하니까 지방가면 올라갈 생각만 한다. 부장검사도 인지수사를 더 할 것 같으면 2,3년까지 남겨두고 필요없으면 바로 뺄 수 있도록 수시인사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부장검사를 특수1부장 시켜라, 형사 1부장 시켜라 이게 대통령이 발령내도록 돼 있다. 경직돼 있다보니 효율성이 없다.
 총장 인사, 검사장 인사, 부장 인사, 검사 인사가 중요하다.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치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인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내가 30년2개월 동안 20번 인사를 당했다.

 -어느 장관이 한 검사 놓고 몇군데에서 전화 받았다고  소개한 적 있는데, 총장재직 시절 인사 부탁은 어땠는지 소개해 달라. 그리고 중요한 정치적 사건 때 청와대나 법무부장관 지시나 지침 받은 적은 없나.
 “10여곳에서 부탁들어왔다는 얘기 나도 안다. 총장에게는 부탁이 안 들어오더라. 인사권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저도 총장 되면 많을 줄 알았는데. 인사는 총장을 대행해서 대검차장이 검찰국장과 협의한다. 총장은 중수부장 기획관 이런 데 복안을 갖고 차장 통해 조율한다. 안 되는 건 장관과 직접 만나 조율한다. 검사장 인사하다보면 워낙 말 많아서 세분화해 뒀다. 어떤 경우 유능한 인사가 빠진다. 지역안배 때문이다. 어느 기수에는 특정 지역이 몰려 있고, 어느 기수에는 독야청청 있다가 혜택보고. 어느 기수는 공안만 몰려 있고 특수만 몰려 있고 그런다. 저는 외부에서 부탁을 안 하더라. 자신있게 말하는데 대검 과장 인사하면서 설명하지 못하는 인사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했다. 설명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사건 관련 질문에 대해서는 물론 평소 협의가 있으나 감히 말하는데 제 스타일 알겠지만 정치권에서 구체적 사건에 대해 말 못한다. 장관도 못하더라.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시대 간섭하는 과정이 특색이 있는데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검찰과 대화하면서 통제하지 않겠다, 간섭하지 않겠다고 공표를 했기 때문에 일절 없었다. 거기서 안하니 아랫사람들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총장이 어떤 결정할 때 누군가 지침을 주면 좋은데 혼자 결정해야 할 때 외롭고 힘들었다. 총장시 가장 어려운게 혼자 결정하는 것이다. 아무도 답을 줄 수 없다. 다 드러내놓고 설명해서 조언 구할 수도 없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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